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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타로스

어느 봄날에,


  척박한 이 땅에도 봄은 찾아와 어느덧 햇살은 제법 따사로웠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다소 서늘하긴 하여도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그간 꽁꽁 닫아놓았던 창에도 이제는 틈새가 생기어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 창가에 앉아 슈발만은 밖을 보고 있었다. 고된 훈련 뒤 만끽하는 짧은 휴식이었다. 노곤히 지친 몸 위로는 다만 얇은 티셔츠만 걸치고 있어, 그 안으로 스미는 바람이 상쾌했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지나가는 사람이 떠드는 이야기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 등을 눈에 담았다. 언제고 이 창가에선 그런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건물 안으로는 이형의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하는 전사들이 살기를 불태우며 검을 맞대고 있어도, 그 밖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 뭘 그렇게 보고 있나. ]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 학구파인 룸메이트는 그새 도서관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할 일도 없었나보지, 라며 가벼운 일도 빼먹지 않고 이죽거리는 성격은 아무리 오래 함께 지냈어도 달갑질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지라 슈발만은 그 말엔 응대도 않고 어깨 너머로 룸메이트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로 긴 다리를 얹어놓고 등을 기대어 책을 펼치고 있었다. 무슨 책이야, 라고 물었지만 답해주는 제목은 슈발만으로선 도저히 흥미를 가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대화가 끊겼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전투와 관련된 일 외에, 관심있는 일도, 재능도 무엇 하나 비슷한 점이 없었다.
  슈발만은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고 불가사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내가, 왜, 지금 여기에서 너와 함께 하고 있을까.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와의 친밀함은 도저히 그로서도 생각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까닭에, 봄바람을 느끼듯 그에게서 편안함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다시 전장으로 나가게 될까.

  겨울이라 잠시 멎었던 전투는 바람이 좀 더 따스해지면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그때면 지금처럼 느긋한 시간은 다시 추억으로 묻은 채, 이런 느긋한 생각따위 할 수 없는 격렬한 전투를 매일 겪어야 할 터였다. 란더스, 슈발만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은 저를 보지도 않고 무심히 넘기면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만은 돌아봐준다. 언제고 네가 부를 때만은 네 시선 닿는 곳에 있어주겠다는 것마냥.

  그리고 언제나 저에게 다가와준다.
  제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저는 항상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다가오는 것은 오직 그 뿐이다. 흥미롭게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침대 위에 올려두고 그가 걸어왔다.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려 이마에, 콧날에, 입술에 키스를 떨군다. 그 감촉을 슈발만은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알고 있어, 라고 응답하듯 그를 올려보았다. 란더스가 온화하게 웃었다.

  [ 덩치도 큰 녀석이 어울리지도 않게 어리광 부리긴. ]

  키스하면서도 징그럽다, 라고 중얼거려서 슈발만은 그만 짧게 웃어버렸다. 의지하고 있었다. 그만은 믿을 수 있다. 어느 순간이고 기댈 수 있었다. 무엇하나 비슷한 점이라곤 없으며, 사사건건 부딪친다 하여도 그만이 저에게 유일한 존재였다. 저 역시 그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매년 봄바람이 불 때마다, 겨울에 이별을 고하듯 때때로 불안한 감정이 고개를 치미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는 잠시 묻어두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슈발만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