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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

정우성, 그리고 놈놈놈

우연한 기회에 어떤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이병헌이나 송강호에 대한 설명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어서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한 반면, 정우성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것은 아마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은 얘기가 얼마 있는 반면에, 정우성이란 배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놈놈놈으로 겨우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나에게 신인배우였다.

물론 정우성이란 이름을 몰랐던 건 아니지. 고등학교 시절이었나,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개봉할 당시에 정우성을 보겠다고 반 친구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며 영화관에 몰려갔던 기억이 있으며, 종종 CF에서도 봤으니까. 그러나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거나, 흥미를 끄는 점은 없었다. 그래, 데이지 개봉 당시에도 나는 당시에 관심을 두고 있던 '이성재'의 영화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도 혹평을 받길래 보러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놈놈놈은 나에게 정우성이란 사람을 '알려 준' 영화가 되었다.


영화를 보고 와서, 태구와 창이에게 몰입한 것은 나로선 진정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입장에서, 도원은 매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도적으로 스토리를 이끄는 인물이 아니거든. 윤태구와 박창이는 과거에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인연이 있었으나, 박도원에겐 그런 게 없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 특출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인물 간의 화학작용이 빛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두 남자의 강렬한 연기, 그로 인한 화학작용에 미친 듯이 이끌렸으니까 자연스레 도원에게 시선이 덜 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나 나에게 놈놈놈은 박도원이다.

놈놈놈이란 영화를 떠올리면 윤태구와 박창이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가 펼쳤던 화려한 액션, 그야말로 쾌감 넘치는 아름다운 화면,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긴 롱코트를 휘날리며 기나긴 장총을 휘두르는 순간의 아름다움, 그야말로 '우월하다'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화면 안에 펼쳐지던 시각적인 즐거움.

그가 이병헌이나 송강호가 펼쳐보이는 연기의 영역에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면,
역시 이병헌이나 송강호도 그가 펼쳐보이는 아름다움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가 없었더라면 놈놈놈이 웨스턴 영화? 어이구, 분위기 도저히 안 날 것 같은데. :D

그래서 나에게 놈놈놈은 정우성의 영화다. 송강호는 우아한 세계나, JSA 등에서 더욱 인상적이었고,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 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창이는 매력적이고 강렬하지만, 박도원은 그보다 더 화려하다.그리고 당신의 이름 석자밖에 모르고,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던 나는 앞으로 당신 이름만 나오면 쫑긋 귀를 기울이게 되겠지. 소비자로서의 경탄은 어디까지나 이 선까지. 그러나 애정은 이미 그 선을 넘어서.

덧. 글을 쓸 때면 객관적이 되려는 버릇이 있나. 다시 읽어봤는데 왜 이렇게 시선이 차갑게 느껴질까. 나름의 빠심을 토로한 글인데 칭찬인지 흉을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아니예요, 박도원 너무너무 좋다는 뜻이예요, 실은. 그 박도원을 연기한 정우성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고. ㅠ_ㅠ

엄밀히 말하면, 박도원으로 2차 창작이 힘들었던 까닭은 아름답고 반듯하던 영화 속 이미지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고 싶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그는 지금 그 상태로도 완벽해 보였으니까. 그 누구의 손을 타지 않아도 되고, 그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도 될 만큼, 고고하고 능력있고 그래서 굳이 애정 따위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 같아서. 얘는 좀 개조가 필요해, 라고 느꼈던 창이와는 완벽히 극과 극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실은 그래서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태구는 도원이를 굳이 변화시키려 들지 않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