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발만이를 좀 심란하게 하고 싶어서, 육체적으로 괴롭힘당하는 것보다 심적으로 혼자 생각하다가 괴로워하는 거 좀 좋아합니다.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링에 대하여 몸부림치면서, 이건 아냐, 싫어, 하는 거. 그야말로 아무도 손을 뻗어줄 수 없고, 오직 혼자 괴로워해야 하는 상황이요. 얘기하다보니까 이게 더 잔인한 것 같아.
지독한 악몽을 꾼 듯싶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눈을 뜬 슈발만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천장이 낯설다고 느꼈다. 꼬박 8년 간 보아왔던 회색빛 돌은 온데간데없이 불빛이 일렁이는 너머로 나뭇결이 뚜렷했다. 아아, 여기가 어디지. 식은땀이 흥건했다. 어디선가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차갑게 식어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컥컥대며 소리를 내보려는데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무거웠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슈발만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러나 눈앞을 뒤덮는 건 뜨거운 불꽃과, 바닥 위로 고여 흐르는 핏물뿐이었다.
싫어, 하고 그르릉 소리를 내며 슈발만은 몸을 웅크렸다. 마치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 마냥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딱딱한 나무판자를 덧대어 그 위로 거친 천을 덮었을 뿐인 침상에 뼈마디가 부딪쳐 고통스러웠다. 떠오른 영상을 털어내듯 고개를 휘저어도, 그날의 격렬한 열기까지 고스란히 피부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힌다. 의식이 아득히 멀어졌다.
슈발만은 힘겹게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걱정스런 속삭임과 함께 서늘한 손을 붙잡아 올 터였다. 슈발만, 하고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꽉 막힌 것만 같은 가슴을 연신 두드려대며 슈발만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무언가를 찾듯 두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손바닥에 닿는 건 땀이 식어 묻어나는 서늘한 감촉뿐이었다. 슈발만은 잔뜩 찡그려 감았던 눈을 홉떴다.
케케묵은 곰팡내가 난다. 눈앞엔 여전히 나뭇결이 선명한 천장이 자리했다.
슈발만은 흐느끼며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란더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이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을 풀어낼 열쇠였다. 슈발만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기억에 놀라 바들바들 떨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았다. 근처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하여 몇몇 기사와 함께 원정을 나갔던 참이었다. 성으로 돌아오자 그곳엔 믿을 수 없는 참극이 벌어져 있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를 낯선 기사들이 성 안을 가득 메워 눈에 띄는 사람은 모조리 검으로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슈발만은 눈을 치떴다. 자신과 함께 성을 나섰던 기사들도 긴장하여 검을 바로 잡았다. 누군가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왕국 기사단.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단 하나였다. 그들에겐 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당신은 죽이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며 이죽거리는 그들 사이로 죽은 동료의 모습을 보며 슈발만은 절규했다. 용서치 않겠다, 네 놈들을 기필코 죽이고 말겠어, 하고 포박되어 끌려가던 순간에도 발음도 분명치 않은 온갖 욕지거리를 늘어놓아도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 놈들을 지휘하는 자가 누구냐……!
기사 선임을 받은 곳이었다. 온화한 웃음을 짓고 저희들을 토닥이던 영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것빼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신입 기사 시절부터 마침내 가까운 곳에서 주군을 지키게 될 때까지, 수없이 영주가 집무를 보던 회당을 들락거렸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슈발만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꽉 눌러 감고 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만을 가까스로 듣고 있었다.
―어서 오게, 슈발만.
이윽고 들린 것은 의외로 지독히 낯익은 목소리였다. 주군의 죽음과 동시에 슈발만은 그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8년간이나 동고동락해온 친우이자, 전장에선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였다. 단순히 그 정도로 정의내리기 힘든 그 무언가가 존재하던 관계였다. 그저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으로도 반가워 슈발만은 반색하며 눈을 떠 저를 붙들고 있던 병사들마저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려했다.
그러나 눈앞엔 도저히 믿기 힘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영주의 자리까지 길게 놓인 붉은 색의 카펫 위로 갑옷을 걸친 수명의 사람들이 겹쳐 쓰러져 있었다. 잘못 볼 리 없는 자신의 친우는 누군가의 멱살을 붙든 채, 웃는 낯으로 슈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옷차림이 낯이 익었다. 붉은 색조의 망토를 길게 등 뒤로 늘어뜨린 그 옷은, …아아, 슈발만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털썩, 하고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샌가 병사들은 슈발만에게서 손을 뗀 채 저만치 물러서 있었다. 슈발만은 바닥을 박차고 서둘러 뛰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황급히 붙들어 일으켰다. 그는 슈발만을 보고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식의 웃음에는 이골이 나있었다. 슈발만은 숨까지 멈추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복부에서 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는 이미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을 정도로 도저히 살아남을 가능성이라곤 보이질 않았다. 영주님, 하고 안타깝게 부르자 그는 힘겹게 입을 뻐금거렸다.
―…부디, 슈발만, …내 아들을…….
오직 그 한마디가 유언이 되었다. 제가 진심으로 섬겼던 주군의 눈을 감긴 슈발만은 그를 바로 놓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 시간에 친우이자 동료였던 남자를 슈발만은 차분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란더스. 이런 어조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어, 기이하게도 그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와는 언제고 승부를 내고 싶었다.
란더스, 나는 어쩌면 무의식에서라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슈발만은 생각 외로 차분히 가라앉은 자신의 마음속을 더듬으며 입 안으로 속삭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야말로 란더스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란더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서 란더스는 저를 대적자로 내세웠을 것이다. 마음 깊이 아껴왔던 상대가 저를 향한 명백한 살의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란더스는 오히려 기뻐보였다. 그의 눈동자 안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희열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 뒤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검을 맞대고 실력을 겨뤘다. 하늘이 아직 푸를 적에 시작했던 대결은 마침내 하늘이 붉게 물들 때까지 지속되었다. 땀방울이 카펫 위로 떨어져 검은 점을 수없이 그렸다. 오직 격해진 숨소리와, 검이 부딪치는 쇳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고 슈발만은 무심코 과거를 더듬었다. 아마도 그와 처음 만났을 때였던 것 같다. 기사 수련생을 선발하기 위한 토너먼트 때였다.
그 때처럼 승부는 슈발만의 승리로 끝났다.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 검은 너덜해진 갑옷을 뚫고 란더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확실하게 절명할 수 있는 상처였다. 전신을 가르는 고통에 고작 일그러진 형태밖에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란더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네 녀석은 이길 수가 없군, 슈발만. 이번에도 네가 이겼다, 기쁜가? 이로써 네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떤가, 슈발만!
과거에 친우였던 자가 제 앞에 엎드려 울컥, 피를 토해내었다.
그는 죽을 것이다. 투둑, 그의 핏물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우뚝 그의 옆에 선채로 잠시간 란더스를 응시하던 슈발만은 곧이어 등을 돌렸다. 무릎을 굽혀 상태를 살피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약속이 되어있었던 듯, 왕국기사단 중 누구도 슈발만을 잡지 않았다.
그 날의 일을 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넘겼다고 생각했다. 영주님의 후계자인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이전부터 기사단 전체가 찾고 있던 오볼루스를 찾아 떠나야지, 하고 슈발만은 너무도 가볍게 다짐했다. 반드시 찾아오겠다고 겨우 살아남은 주군의 아들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직위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은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처연한 웃음을 한 차례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 란더스……. ]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전장에서 겪은 일에 대한 충격으로 악몽에 시달리다 깨면 그가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으며 이마 위로 입술을 떨궈왔다. 괜찮아, 슈발만. 저보다 서늘한 그의 체온은 기분 좋아서 그가 손을 꽉 힘주어 붙들어오면 그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슈발만은 그럴 때마다 어린 애 취급하지 말라며 웃었다. 그러면 란더스는 너도 가끔 그런 식으로 날 대하잖나, 라고 반박하곤 했다. 아아, 그렇긴 하지. 그렇듯 적당히 응수하며 슈발만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이며 어깨는 그 감촉만으로도 믿음직했다. 저도 모르게 잠에 취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던 적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갑작스레 숨을 멈추고 곤란한 듯, 어리광 부리지 말라고 속삭이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그러하였을까.
차마 입에 올리진 못하였어도, 그를 사랑했다.
상대도 눈앞에 없는데 슈발만은 불분명한 어조로 자꾸만 속삭였다. 이제 그는 없었다. 다시는 만날 수조차 없다. 오래도록 익숙했던 기사단 숙소를 떠나, 이런 허름한 여관에 묵고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은 영영 떠나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악몽에 허우적거려도 그런 모습까지 끌어안으며 저를 다독거려줄 사람도, 하잘 것 없는 일까지 함께 나누며 웃고 슬퍼해줄 사람도, 친우 이상의 관계로 짤막히 키스를 나누고, 그 체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치 않았다. 소년기에서부터 청년기까지 마치 분리된 반쪽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였던 상대는 사라지고, 이제는 저 홀로 남았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너를 보내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는 이런 일조차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짓까지 행했어야 했나, 란더스. 네가 바라던 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너는 나를 죽였어야만 했다. 그깟 쓸데없는 대결 따위 펼치지 않고, 오직 그를 위하여 그런 식의 참극까지 벌였을 텐데, 그렇듯 내뱉는 한 마디마다 고스란히 란더스의 대답이 돌아온다.
알고 있었다.
지독해.
꿈이라고 생각했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너를 믿었다, 슈발만.
그리고 너는 이제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슈발만은 절망하며 통곡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밤새도록 울었다. 의미도 모를 말들을 뱉어내며 울부짖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끝내 새벽녘에 지켜 쓰러질 때까지 슈발만은 온몸으로 그의 부재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몸부림 따위 소용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현실은 악몽보다 지독했다.
가볍게 쓰기 시작한 거였는데 어쩌다 5년 전 과거 썰까지 풀게됐지. 저런 장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란더스 시점에서 풀려던 거라 ..........쓰고보니 밋밋해서. 원래는 그냥 괴로워하는 장면만 한 두페이지, 쓸랬는데 막 살이 붙어서. OTL 나중에 제대로 써야지.
근데 정말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굳이 비엘설정 아니더라도 과거에 친구였던 사람을 직접 죽을 정도로 해하고, 15레벨 로트루아 시나리오에서 란더스를 만나고서 란더스,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정말 안 잊혀집니다. 그런 식의 온갖 복잡한 감정이 아마 한데 얽혀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죽지 않아줘서 고마워ㅠ_ㅠ